[기획칼럼] 아산만의 큰 나루, 한진포구
  • 작성일
    2021-07-15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660
  • ▲ 1960년대 한진포구에 정박중인 어선. 멀리 행담도가 보인다. (방우진 전(前) 한진1리 이장 제공)
    [충남도정신문 기획칼럼] 내포포구이야기 - 당진 한진포구
    아산만의 큰 나루, 한진포구
    조선시대 ‘대진’으로 불려
    어업·교통·물류 중심지
    당진의 서북쪽 끝, 행담도와 서해대교를 굽어보는 아산만 어귀에 한진포구가 자리하고 있다. ‘큰 나루’라는 뜻을 지닌 한진(漢津)의 역사는 깊다. 조선시대에는 ‘한’과 마찬가지로 크다는 뜻을 지닌 대(大) 자를 차용하여 대진(大津)이라고 불렀다. 1861년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 따르면 대진에는 백제 시대부터 창고와 관아가 있었으며, 당나라를 오가는 상인과 사신이 대진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한다.
    20세기의 한진포구는 아산만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포구로 어업의 중심지였다. 5월에서 6월 사이가 되면 아산만 연안에서는 엄청난 양의 준치가 잡혔다. 한진포구의 어민들은 준치 잡이 시기에 서로 “그 배는 몇 동(1,000마리 단위)이나 잡았어?”라고 물어보고는 했다. 1970년대까지 한진포구에서 열리는 파시(波市: 배 위에서 열리는 어시장)에는 준치를 사기 위해 수많은 선박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준치는 가시가 억세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이 좋기 때문에 지역에서도 많은 양을 소비했다. 한진포구 주민들은 각 집마다 준치 몇 십 마리를 절여두었으며, 여름에는 반찬으로 먹었고 가을에는 젓갈로 삭혀 김장 등에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한진에 있던 일본인들이 준치를 먹고 “가시만 없으면 조선 놈들 먹기에는 참 아까운 생선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한진포구의 사람들은 포구 북쪽의 야트막한 야산에 있는 당집에서 매년 정월 첫 용날에 당제를 지냈다. 어업이 활성화된 지역이기 때문에 당제는 만선을 기원하는 풍어제(豊漁祭)의 성격을 지녔다. 포구의 어민들은 당제 이후 처음으로 잡은 물고기를 항상 당집에 바치곤 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 한진포구는 어업뿐만 아니라 교통·물류의 중심지로 충남 북부와 경기·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과 물산이 배를 통해 오갔기 때문에 한진포구는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포구에는 5일장이 열렸고,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구두나 잡화 등 인천에서 배로 실어온 공산품을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1987년의 아산만 LNG 항만 개발과 1995년의 아산항 종합개발계획이 시행되면서 한진포구의 어민들은 조업할 공간을 잃었고, 지역의 어업은 사장되었다. 현재는 작은 낚싯배들만이 한진포구에 정박하고있다. 오늘날의 한진포구에는 옛날과 같은 풍부한 물산이나 오고 가는 사람들은 없지만 서해대교와 행담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경관이 있다. 서해대교 교각 사이로 보이는 일출과 아산만의 야경은 한진포구의 자랑으로,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 일출을 보러 한진포구를 찾아오고있다. 한진포구의 당제는 어업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유산으로 남아 전승되었으며, 2020년에는 ‘한진 풍어당제’라는 이름으로 당진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정래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내포해양연구부 선임연구원
  •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