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공심으로 행동한 지도자, 중봉 조헌
  • 작성일
    202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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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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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도정신문 기획칼럼] 충남의 유학자들 - 중봉 조헌(1544~1592)
    공심(公心)으로 행동한 지도자, 중봉 조헌
    정명가도 요구한 일본사신의
    목을 벨 것 요구하며 도끼 시위
    임란 발발 뒤엔 의병 일으켜
     
    ‘내가 올린 상소가 부당하다면 도끼로 나의 목을 치라’고 한 선비가 있다. 충청도 옥천에서 상경한 조헌은 도끼를 옆에 두고 대궐 문밖에서 3일간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고 요구한 일본 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일어났다.
    율곡과 토정의 문인이었던 선생은 율곡의 뜻을 잇는다 하여 후율이라 하고, 충청도 옥천의 산골로 은거해 후율정사를 지어 스승을 기억했다. 모함을 받고 파직되기 전 보은 현감으로, 이후 공주목 제독관으로 복귀해서는 지방교육환경을 개선해 많은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오기도 했다. 의병을 일으키고자 쓴 격문을 보고 1600여 명이 모인 것또한 충청도에서의 선생의 지도력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출신을 따지지 말고 인재를 기르자 했고, 노비를 양민으로 만들자 했다. 왜군이 침입할 지역과 지역방어에 적합한 인물까지, 그의 상소는 분석적이었지만, 임금은 듣지 않았다. 왜적이 침입하여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했으나, 충청도 순찰사의 방해로 강제해산을 당하고 남은 의병 700여명으로 후속군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금산전투는 곡창지대 전라도를 지켜내며 임진왜란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선조는 말고삐를 쥔 마부에게도 내린 선무공신교서를 그에게는 내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도끼를 옆에 두고 상소를 올린 그를 무례하다고 하지만, 가난한 삶에서 체득한 실천력은, 항상 그릇이 작은 임금을 탓하기보다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선생을 이끌었다. ‘뜻을 얻지 못한다면, 혼자서라도 도를 행하라(不得志獨行其道)’는 맹자의 가르침을 실천한 이가 몇이나 될까. 선생은 늘 강했고, 묵묵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공심보다는 처세를 말하는 상관에게 면전에서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지위에 오르기는 어렵다. 칠백의총의 전사들도 굳건한 신념으로 눈을 감았을 것이라는 믿음과 동국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선생의 이름을 보며 작은 위안을 삼는다. 삶은 늘 그렇듯이 억울한 일투성이지만, 그래도 ‘지구는 돌고’, ‘아닌건 아닌 것이다’.
    /박정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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