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과 끝
  • 작성일
    2021-06-07
  • 작성자
    메이아이
  • 조회수
    520
  • [충남도정신문 기획칼럼]충남의 성(城) - 예산 임존성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과 끝
    험준한 지세와 견고한 성벽
    백제의 서방 관할하던 방성
    흑치상지 손에 역사 막 내려
     
    예산의 예당저수지에서 서쪽으로 시선이 닿는 곳에 봉수산이 있다. 그 꼭대기엔 마지막까지 항전한 백제부흥군의 충혼이 서려 있다. 봉수산은 우리에게 곁을 내어주기 싫은 듯 ‘그곳’으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그 옛날 나당연합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쉬이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곳은 바로 임존성이다. 660년 사비성 함락 이후 계속 항전하던 백제부흥군은 여력이 없었다. 상황은 점차 부흥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백제의 국운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정산의 두릉윤성이 신라군에게 함락되기에 이르렀으며,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고자 바다를 건너왔던 왜 수군도 백강 입구에서 당나라군에 무너졌다.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층들이 줄지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데다, 의자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부여풍까지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오직 지수신 만이 임존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임존성은 험준한 지세와 견고한 성벽을 가진 요새였다. 백제의 지방통치구역인 5방 가운데 서방(西方)을 관할하던 방성(方城)이었고, 사비성 함락 직후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문무왕은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기에 백제는 평정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즉 임존성의 수성(守城)은 백제의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반대로 임존성을 빼앗기는 순간 백제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존성의 문은 당나라 대군 앞에서도 열리지 않았다. 고구려까지 정복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고자 했던 당나라의 야욕은 잠시 저지됐다. 당나라는 묘수를 썼다. 3만 명의 백제인들을 규합해 임존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의 첫 신호탄을 울렸던 흑치상지에게 지수신의 부흥군을 공격하도록 꿰어낸 것이다.
    임존성의 문은 흑치상지 앞에서 열렸다. 지수신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제부흥을 함께 외치던 흑치상지의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 이곳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그렇게 663년 매서운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인 동시에 지금 우리에게 아쉬움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곳으로 그 여운이 남아있다.
    /박재용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