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백제 부흥의 한을 품다
  • 작성일
    2021-05-18
  •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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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8
  • ▲ 두릉산성 성벽 석축
    [충남도정신문 기획칼럼] 충남의 성(城) - 청양 두릉산성
    백제 부흥의 한을 품다
    왕도 사비성 보호하는 역할
    북방·서방성을 잇는 교차점
    백제 폐망 후 부흥운동 거점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마을 초입에는 백곡3.1운동기적비(白谷三一運動紀跡碑)가 세워져 있다. 1919년 4월 정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백곡마을 사람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이곳 사람들의 염원과 의지를 담은 비석은 두릉산성(豆陵山城)이 있는 계봉산꼭대기에도 자리하고 있다.
    바로 백제부흥군의 위령비다. 1360여년 전 백제인들도 이곳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부흥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660년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나당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백제는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왕은 당나라로 끌려갔지만, 살아남은 백제인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백제 부흥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두릉산성도 백제부흥운동의 거점 중 하나였다. 이곳은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왕도인 사비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사비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백제 때 열기현(悅已縣)이라고 불렀으며, 정치·행정의 중심지는 두릉윤성(豆陵尹城)에 있었다. 여기에서 두릉윤성이 지금의 두릉산성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두량윤성·이성’이라고도 기록돼있고, 이후 계봉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산성이라 하여 계봉산성으로도 불렸다.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청양군에 속했다. 그 이전에는 부여에도 속했다가 어느 때는 공주에도 속했다. 이는 정산지역이 청양과 공주, 그리고 부여를 잇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칠갑산을 넘어가면 청양, 더 넘어서는 백제부흥운동 세력의 최후 근거지인 임존성으로 이어진다. 백제시대에는 수도인 사비성과 북방성, 서방성을 이어주는 인적·물적자원의 교차점으로 활력과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었으리라.
    그래서 이곳에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 건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때는 661년, 백제 좌평정무(正武)를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했다. 이에 신라 무열왕은 품일(品日)에게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품일이 이끄는 신라군이 두릉윤성의 남쪽에 군영을 설치하려고 하자, 부흥군은 신라군을 기습해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게 백제부흥군은 두릉윤성에서 약 2년간 나당연합군을 막아냈지만, 663년 신라 문무왕과 김유신 등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의 공격을 받고 끝내 함락됐다. 부흥군은 이후에도 임존성으로 거점을 옮겨 계속 항전했다.
    이렇듯 두릉산성은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이 강하게 깃든 곳이다.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이를 기리고자 매년 4월 위령제를 지내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고, 백제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박재용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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