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충청 세곡보관하던 공세곶창
  • 작성일
    2021-05-18
  •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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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산 공세곶창(붉은 원,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충남도정신문 기획칼럼] 내포 포구 이야기 - 아산 공세곶포
    충청 세곡보관하던 공세곶창
    공세곶포에 세곡 보관 조창
    안성천 등 수로교통 중심
    공세리성당 등역사문화자원도
     
    1601년 7월 광해군의 명을 받고 아산 공세곶포에서 선박을 마련하여 충청도 세곡을 상납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교산 허균(許筠)이다. 그는 1601년 해운판관에 임명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곡운송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다. 그 중 아산 공세곶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조창이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국가재정 운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왕조는 이곳에 공세곶창이라는 조창을 설치하고, 충청도 40군현의 세곡을 이곳에 집적하였다. 공세곶포에 조창이 설치될 수 있었던 것은 안성천, 곡교천, 무한천, 삽교천이 교차하는 수로교통의 결절점일 뿐만아니라 대형선박이 아산만을 통해 서울까지운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청도 수로교통의 중심지에 설치된 공세곶창은 임진왜란 이후 그 위상이 조금씩 낮아지다가 1865년 폐지되었다. 지금은 공세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해운판관비와 아산현감비만이 이곳이 조창의 유적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공세곶창은 성곽건축에서도 유의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초기 조선왕조가 설치하였던 전국의 9조창 중 현재 남아 있는 창성(倉城)으로는 공세곶창과 법성포창 뿐이다. 공세곶창성은 1631년에 흉년을 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눠주었던 곡식인 진휼곡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공세곶창이 세곡집적지일 뿐 아니라 충청도 지역의 진휼곡을 보관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창성은 공세곶창을 둘러싼 표주박 모양의형태를 가졌으며, 창성의 북성 주변에는 조운의 성공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당인 침해당이 있었다. 공세곶창성은 비교적 그 유적이 잘 남아있으며, 성곽 건축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공세곶창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 이곳에는 공세리성당이 들어섰다. 공세리성당은 1894년에 지어져 현재까지 역사를 자랑하는 천주교의 성지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4대 박해(신유, 기해, 병오, 병인)로 1만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는데, 그대부분이 내포지역의 출신이었다. 특히 병인박해 때 아산지역 출신의 순교자는 모두 32명이었으며, 공세리성당은 이들을 비롯한 순교자 23명의 묘석을 모시고 있다. 이로 인해 공세리성당은 충청남도 지정기념물144호에 지정되었고, 2005년에는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아산 공세곶포는 전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문화자원을 간직한 곳이다. 그 기저에는 공세곶포가 수로를 통해 사통팔달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이 있었다. 내포의 포구가 충청도의 역사문화에 끼친 영향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포구의 역사문화자원발굴과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 문광균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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